말기암 환자의 머릿속은 아마도 암을 겪어보지 못한,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것 아닐까 싶다. 게다가 경계선 인격장애가 있었던 50대 초반의 제니에게 말기암은 아마도 더 큰 폭풍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2월 말 "하이드로몰폰 사태"를 겪으며 난 제니의 맘과 머릿속이 상당히 궁금해졌다. 경계선 인격장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이 궁금해졌다. 제니의 통증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약을 바꾸는 과정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이번 포스팅에서 말해보려고 한다.
하이드로몰폰 사태의 배경
제니가 2월 중순 즈음이면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했는데 3월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완화의료팀 가정방문 간호사가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방문하고 있었다. 1월 말 즈음에는 완화의료팀 간호사 중에서 가장 보스로 보이는 (아마 말기에 가까워졌을 때의 환자만 보는 간호사 같았다) 간호사가 종종 들려서 제니의 상황을 살폈다. 2월 정도부터 달라진 것이라면 멜번에 있는 통증 전문의 (소개는 이렇게 받았으나 내 예상으로는 완화의료팀 전문의가 아닌가 싶다)와 2주일에 한 번 정도 화상으로 상담을 했다. 주로 얼마나, 어떤 통증이 있고, 살아가는데 어떤 지장을 주는지, 환자가 어떤 것으로 인해 가장 불편해하는지 등을 상담하고 상담에 따라 약이 추가되거나, 용량이 높아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보스로 보이는 완화의료팀 방문 간호사가 항상 함께했다.
멜번에 있는 의사와 상담하기 전에 간호사들은 제니의 통증이 현재의 약 - 몰핀 - 으로 조절되지 않는 것 같다며 걱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2월 말 즈음 멜버른에 있는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hydromorphone 하이드로몰폰 (모르핀보다 강력)으로 바꾸는 것이 어떤지 제니에게 물었다. 제니는 통증을 경감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완화의료팀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하이드로몰폰 처방전을 받아주고, 내가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오자마자 그들은 니키펌프 (24시간 동안 소량의 약이 끊임없이 환자의 몸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기구)를 가져왔다.
3일 동안 하이드로몰폰을 테스트한 후 용량을 조절해서 니키펌프 기계 없이 기존에 몰핀을 사용하던 때와 같이 필요할 경우에만 작은 주사기를 사용해 피하지방층에 주입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복잡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약을 바꾸는 과정에서 테스트 3일이 필요할 뿐이었다.
2월 28일 시작과 동시에 중단된 하이드로몰폰 테스트
그렇게 2월 28일 오후 2시 니키펌프에 하이드로몰폰이 담긴 주사를 넣고 작동을 시작했다. 간호사는 PRN (필요할 때마다 엑스트라로 더 약을 주는 것)은 하이드로몰폰 2mg 으로 하고 왜 주는지, 어떤 통증 때문인지도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오후 2시에 시작된 하이드로몰폰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중단되었다. 제니는 숨찬 증상이 하이드로몰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밤 11시 반 경에 니키펌프를 중단하고 전에 복용하던 몰핀과 오딘 조합을 새벽동안 사용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난 이를 완화의료팀에게 전달했고 간호사가 다시 방문해서 제니를 설득했다. 하이드로몰폰과 모르핀은 다른 약이기 때문에 이렇게 섞어서 사용하면 얼마큼의 양이 필요한지 모른다며 다시 하이드로몰폰 니키펌프를 사용해 보자고 강력하게 설득했다. 제니는 짜증이 가득 찬 채로 다시 니키펌프에 몸을 맡겼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3월 1일에는 거의 매시간 PRN으로 하이드로몰폰을 줘야했다. 허리 통증과 숨 찬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제니는 이 약 때문에 숨이 더 차다며 주사기를 중단하고 싶다고 몇 번 말했다. 난 하루만 더 참아보자고 설득했고 그렇게 2일이 되었다.
경계선 성격장애 vs ...
제니는 오전에 상당히 짜증이 가득한 상태였고, 계속해서 숨이 차는 것이 심해진다며 오후 1시경에 하이드로몰폰 주사를 중단했다. 다시 완화의료팀에 연락을 하니 완화의료팀은 모르핀과 오딘을 사용하지 말고 PRN 용량을 하이드로 몰폰 4mg으로 높이라고 했다. 24시간 내내 흐르는 하이드로몰폰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두 배 정도 높은 용량이 필요했고, 2일까지는 하이드로몰폰으로 통증과 숨찬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3일부터는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 오딘, 몰핀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니는 여전히 짜증이 가득했다. 하이드로몰폰 사태 덕분에 더 자주 완화의료팀이 드나들었고, 제니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이렇게 많은 용량의 모르핀으로도 통증이 조절이 안 되었기에 하이드로몰폰을 3일만 사용해 보자"라는 말은 제니의 머릿속에 "내가 너무 많은 용량의 모르핀을 사용해서 완화의료팀에서 난 질 안 좋은 사람, 약을 과용하는 사람으로 찍혔다"라는 이상한 해석으로 꽂혀버렸다.
"그런 거야! 처음부터 내가 맘에 안 들었던 거야!"
"뭐가?"
"내가 몰핀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는 거지."
"근데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몰핀을 그 정도 사용할 정도로 통증이 안 좋으니 약을 바꿔보자는 거지."
"아냐. 날 나쁜 여자로 만드는 거야. 내가 약을 너무 많이 하는 여자, 중독된 여자처럼 보는 거야. 처음부터 그랬던 거야."
"난 아닌 것 같은데..."
"느껴졌어. 특히 그 여자... K... 진짜 눈빛에 쓰여있어. 날 싫어하는 게..."
(K 간호사는 제니가 좋아하던 간호사였다. 물론 하이드로몰폰 사태로 완전히 바뀌었지만...)
경계선 성격장애가 표면 위로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 같았다. 제니는 하이드로몰폰으로 바뀐 계기를 의료팀이 가진 본인에 대한 불신, 의심 그리고 경계라고 생각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경계선 성격장애를 구글에서 찾아보며 공부하다 보니 이건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공식적으로 받은 제니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가 싶기도 했다.
의료완화팀은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약 때문에 숨이 더 찬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처럼 초보 간호사는 그냥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어요. 오히려 숨찬 것이 보통은 더 나아지죠. 잠이 너무 많이 온다 뭐 그 정도면 모를까..."
"어떻게 해야 하죠?"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최우선이고, 우린 이제 다른 약을 또 찾아봐야죠. 뭔가 더 강한 약이 필요할 때가 온 지도 모르니까요."
"더 추가할 약이 있나요?"
"아주 다양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있죠. 멜버른의 의사랑 다시 상의해 볼게요."
그렇게 하이드로몰폰 사태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이 일 이후 제니는 약을 숨기기 시작했다. 아니다. 어쩌면 이 일 이전부터 그랬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몰핀이 한 박스 통째로 없어진 일이 아주 오래전에 있기는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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