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는 2021년 11월에 폐암 4기 뼈전이 진단을 받았고, 12월 말에는 6-8주 정도가 남았다고 전달을 받았다. 1월 말에는 2주 정도 남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케어러로 집에서 제니와 24시간을 함께 하던 나는 이때부터 복잡한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내가 어떻게 제니의 폐암 보호자가 되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제니와의 만남
나는 제니를 2019년 6월 하우스메이트로 만났다. 제니는 호주인, 나는 한국인. 원래 2주만 머물고 다른 집을 찾으려고 했던 임시 숙소 주인이었던 제니. 제니와 나는 의외로 성격이 잘 맞고, 둘 다 간호사에, 중년의 나이에, 집순이에 여러 가지로 괜찮아서 2022년까지 같이 살게 되었다.
모든 하우스메이트들이 그렇듯 나와 제니도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내 입장에서는 제니의 성격 중 이상한 부분들이 너무 거슬렸다. 물론 제니도 그렇지 않았을까 한다. 2022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제니의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제니가 경계선 성격장애로 친구가 아무도 없고 은둔생활을 오래 했다고 들었다. 그전까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면서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2022년 9월 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갈 것을 결심했다. 제니와 함께 사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졌기 때문에 난 제니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늘 같이 보는 것은 고역일 정도였다.
2022년 7월부터 제니는 일터에서 유난히 불평도 많고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은근한 미움을 사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데 갱년기로 땀이 많이 나고 숨이 차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며 쉬운 곳에 보내달라고 하거나, 너무 힘들어서 쓰러졌으니 집에 가겠다고 하는 등의 일이 자주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 가시인 상태였다.
그렇게 다른 병원으로 이직할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던 10월과 11월 제니가 폐암 선고를 받았다. 충격이었다. 미워하던 마음 때문에 더 충격이었다.
제니의 가족
제니는 어머니가 암으로 2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제니, 큰 오빠와 아버지는 멜버른에, 작은 오빠는 퀸즐랜드에 살았지만 제니 말에 의하면 큰 오빠는 10여 년간 가족과 완전히 연락을 끊은 적도 있는 등 상당히 소원한 관계 같았다.
제니는 2019년 멜버른에서 7-8시간 떨어진 도시로 이사했고, 나도 그즈음 그 도시로 이사를 하면서 제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즉, 제니의 가족은 8시간 정도 운전해서 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었고, 먼 곳에 살지만 제니가 많은 의지를 했던 작은 오빠는 2022년 당시 암이 재발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문제는 제니와 새어머니와의 관계였다. 폐암 선고를 받고 큰 병원에서 검사를 하기 위해 아버지 집에 잠시 머물면서도 새엄마와 싸움을 해서 오빠 집으로 거처를 옮겼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제니는 새엄마를 극도로 싫어했다.
내가 놀랐던 것은 딸이, 동생이 암에 걸렸다는데, 그 누구도 운전을 해서 제니를 데려가 큰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제니에게 멜버른 가족 근처에 와서 머물 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멜버른으로 운전을 해서 제니를 아버지 집에 데려다주고, 또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했다. 제니가 멜버른을 떠나 집으로 다시 올 때도 그 누구도 배웅을 하지 않았다.
제니의 법적 의료 대리인이 되다
제니를 미워했던 미안함, 제니의 증상을 갱년기와 유난으로 치부했던 죄책감 그리고 가족 상황을 보고 난 후의 짠함으로 내 맘은 극도의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상태에서 제니는 나에게 큰 덩어리를 던졌다.
”내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재정적인 것은 가족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고 문서를 변호사랑 작성했거든. 근데 의료적인 면에서는 그걸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나 곧 이사 가는데…“
”응.. 알지 그때까지만이라도…“
”그럼 한두 달인데? “
“응.. 언제든 바꿀 수 있데.”
그렇게 난 그 문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서 제니를 책임지겠다는 나만의 문서에도 사인을 한 듯 싶다.
제니와 완화의료
제니는 지난 여러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폐암 4기에 뼈전이가 있었기에 항암과 방사선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입장에서 완화의료 팀에게 남은 여생을 맡겼다. 완화의료 팀은 초반에는 거의 매일 집에 들렀기에 제니와 고양이 찰리 그리고 나는 제니가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완화의료팀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그들은 내가 법적 의료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제니와 유일하게 함께 사는 사람이자 간호사였기에 여러모로 나를 대화에 참여시키고 싶어 했고, 나도 그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다만 11월과 12월에 제니의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에 난 해왔던 일들을 하면서, 제니와 장 보러 가거나, 약국에 같이 가는 등의 일만 할 뿐이었다. 암 전문의를 만나러 갈 때에 정서적인 지지가 필요해서 같이 가거나, 제니가 무거운 것을 들고, 차를 타고 내리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뼈가 바스러질까 봐 상당히 두려워했다) 그것들을 같이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12월 31일.
밤 근무가 있어 잠을 자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더니 집에 완화의료 간호사가 와있었다. 제니는 울면서 너무 숨이 차서 어쩔 줄 몰라했고, 간호사는 나에게 약국에 가서 모르핀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약국에 간 사이 간호사는 제니와 함께 있으며 이런저런 약을 줬고, 내가 집에 오니 간호사는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가져왔다.
한 시간 여 정도가 지나자 제니의 상태가 나아졌다. 난 출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다가, 간호사에게
“저 출근 안 하고 제니랑 있어야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요…”
그렇게 그날 밤을 제니와 함께 보냈다. 아직도 둘이 정원에 나가 2022년이다! 하면서 밤하늘을 바라봤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날 그리고 그다음 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혹시 내가 일을 안 하고 집에서 너랑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럼 넌 경제적인 건 어떡하고?”
“내가 병가가 많이 쌓여서 그걸 쓸 수 있을 거거든. 문제는 병가를 쓰면 일주일에 받는 돈이 확 줄어들긴 하는데… 일단 네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난 네가 원하면 병가 4주를 쓸 수 있거든.”
“그래? 그럼 나야 좋지. 어제 정말 무서웠거든. 그리고 길어야 6주 남았다고 했으니까… ”
“나도 경제적인 부분은 생각해 볼게. 그것도 나에겐 중요한 일이거든.”
“그럼. 나도 생각해 볼게. 어차피 난 연금을 받을 거니까 일단 가족이랑 의논해볼게.”
제니는 바로 다음 날 가족과 상의를 했는데 경제적인 부분은 걱정하지 말라며 병가를 써서 같이 있어줄 수 있으면 케어러로 같이 병원도 가고, 약과 일상적인 부분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병원의 도움으로 병가 4주를 쓰면서 제니의 풀타임 케어러가 되었다.


2022년 2월 15일
숨찬 증상, 기침과 피로가 전날보다 심했던 하루다. 잘 먹고, 기분도 괜찮아서 오후에는 정원에 물 주기 등을 할 수 있었다.


2022년 2월 16일
전 날과 거의 같은 하루였다. 이틀 동안 변을 못 눠서 변비약을 먹었다.


2022년 2월 17일
7-8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을 때 숨참 증상과 가슴이 죄어오는 듯한 통증이 20여 분간 지속돼서 굉장히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배가 조금 부풀어 오르기도 했는데 변을 두 번 보고 나서 부풀어 오름이 가라앉았다.


2022년 2월 18일
Sertraline을 100밀리그램까지 높여 먹기 시작한 날이다. 이 날도 제니는 숨찬 증상과 가슴이 옥죄어오는 증상을 하루종일 호소했다. 새벽 두 시가 지나서야 조금 나아진다고 했다.
발과 발목의 부종도 심해지다가 밤이 되면서 조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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